1. 고대 브리튼
기원전 1만 1천년경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져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점점 높아지면서 기원전 5~6천년경에 브리튼 섬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 후에는 유럽의 서쪽과 북쪽 해안 지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기원전 4천년 무렵 농업을 들여왔다. 기원전 2천년대에 현재의 네덜란드 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Beaker Folk)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인도유럽어족 언어를 들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브리튼 섬을 장악한 것은 현재의 웨식스 지방의 족장들이었는데 이들의 호화스러운 무덤과 스톤헨지로 알려진 선돌 기념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스톤헨지는 그 당시 대표적인 순례지로 그 치유력을 믿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베리아인이라는 영국 최초의 부족이 처음 왔던 때이다.
기원전 6세기경 켈트족이 유럽에서 건너와 정착한다 기원전 55년에는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가 브리튼 섬 침략하였고 그 후 400년 동안 잉글랜드 지역 지배한다
4세기 후반 게르만족의 대 이동이 시작되어 앵글로색슨족 등이 침략해 오자 로마군대는 철수하고 켈트족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밀려난다
*용어
스톤헨지 : 영국 월트셔주 솔즈베리 평원에 위치한 거석 유적으로 높이 8미터에 무게 50톤에 달하는 거석 수십 개로 이뤄진 선사시대 유적이며 이는 거석주라고도 불리며 고대의 태양신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추측된다 영국의 에브벨리, 프랑스의 엘아니크와 더불어 장대한 규모의 스톤서클 유구로 유명하다
유구 : 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파괴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잔존물이다
켈트족 : 원주지는 청동기 시대의 독일 남동부 라인강 엘베강 도나우강 유역이며 기원정 8세기 무렵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6~4세기 무렵 브리타니아 및 기타 진출하였다. 한떼 널리 유럽을 지배했으나
대략 기원전 1세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의 판도에 브리티니아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 풍습 및 언어는 아일랜드 웨일스 브르타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1)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미의 여신 베누스의 자손을 자칭하는 유서깊은 귀족가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외가 쪽이 로마 귀족하외에 큰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되는 평민 출신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정치적 멘토역할을 하였으며 당시 로마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황제 국가가 아니라 귀족과 일부 민중대표(호민관)가 정치를 이끌어가던 공화정이었다
2)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콘술)에 오를 것은 희망했지만 카이사르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원로원은 집정관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카이사르는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성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집정관에 당성되었다 이를 1차 삼두정치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실현을 위해 폼페이우스와 거래를 하였으며 그의 외동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국유지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스타르타쿠스의 반란 : 고대 로마 노예반란의 지도자로 기원전 73년 70여명의 동료 노예와 함께 양성소를 탈출, 목자, 농노 반농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크라수스 : 로마공화정의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토벌하고 콘솔을 지냈으며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를 하였다
폼페이우스 :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 장군 정치가 해적 토벌 미토리다테스 전쟁 등 오랜 세월에 걸쳐 로마를 괴롭힌 싸움에 종치부를 찍었지만 카이사르와 대립해 패했다
삼두정치 : 로마공화정 말기에 3명의 실력자가 동맹하여 국가권력을 독점한 정치형태 }
3) 집정관을 역임한 후 카이사르는 로마의 속주였던 일부 갈리아 지역(프랑스 남부지역)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지역 전체 정복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7년이라는 기간안에 이루어졌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시 자신이 참전했다는 표시로 늘 진한 붉은색 망토로 입고 전투에 나갔다고 한다 또한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보복적인 정치보다는 복속한 켈트족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정치적 자율권을 주고 농경을 전파해 경제를 일으켰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켈트족은 로마 시민화하기도 하였다
이런 갈리아 정복은 여러면에서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정복으로 얻은 약탈로 부유해졌으며, 전투로 달련된 노련된 군인들을 얻게 되었으며, 복속된 켈트족의 충성과 넓은 영토를 얻게되었다 이런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로부터 더욱 경계를 받았다 협의를 통해 로마 정치를 이끌어가던 귀족들은 카이사르 독주가 장차 귀족권을 약화시키고 1인 독재 시대를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견제하려 나섰다
4)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전쟁 중 전사,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외동딸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등 삼두정치가 붕괴돌 조짐이 보이자 로마 귀족들이 폼페이우스를 끌어들리려고 하였다 혼인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가 끊어지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결별하고 로마 귀족의 손을 잡았다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군대해산, 갈리아총독물러나서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카이사르는 몇 차례 협상을 하려 했지만, 상황을 둘러보니 협상은 불가능하다를 것을 직감하여 내전을 불사하기로 한다 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자신들의 병사들 앞에서 “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그 이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피난가지만 도중에 암살 당하고 말았다
5) 이집트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7세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내쫒고 그녀가 권력을 독점하도록 도왔으며 그녀의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을 얻었다 카이사르는 정적이 사라진 로마로 돌아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은 카이사르였지만 그는 황제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전 시대 귀족들이 각자의 이권에 따라 정체되고 했던 개혁들을 하나 하나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달력을 개정하고 통화 개혁했으며 시민권 확대하고 사법 개혁 등 다방면으로 새로운 정치를 펼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카이사르 정치는 귀족 중심의 공화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떤 대제국 로마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6)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데시무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참여하였다 운명의 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죽었으며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제 2차 삼두정치가 성립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벌였으며 카이사르가 마련한 1인 독재 정치는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획득한 후 초대 황제가 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되었다.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안녕하세요 흔한 직장입니다.
새로운 파트의 제목을 보시고 다들 어? 이게 뭐지? 싶었을 겁니다. ㅎㅎ
다름이 아니라 제가 학생 때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서양사의 이야기가 유럽 러시아 중동 등 여러 나라와 관련이 있어 스케일이 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동양사를 비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절대아닙니다. ) 그래서 성인되서도 종종 유튜브로 서양사 관련 영상이 보이면 시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보니 ,, 뭔가 서양사 관련해서도 글을 적어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겨서 작게나마 끄적거려 올려봅니다.
첫번째 글로 어느 나라부터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처음으로 떠오르는 나라가 영국이기에 영국을 첫번째 이야기 나라도 정하였습니다. ( 생각해보니,,, 대게 단순하게 나라 선정을 한 것이었네요 ㅎㅎ )
단순히 주인장의 흥미로 시작된 파트이다보니 내용이 오타가 있을 수도 있고 부족해 보이겠지만,, 그냥 재미로 또는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정도로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이 글은 개인적인 공부 및 취미 글로 정치적인 것과는 관련히 없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모 저모 서양사 시리즈] 영국사 EP02. 로만 브리튼 (4) | 2025.05.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