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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 이야기] 러시아, 바티칸의 우크라 협상 중재 반대하는 속내는

creator4019 2025. 5. 24.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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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차기 평화 협상 장소로 바티칸이 거론되는 상황에 대해 러시아 외무장관은 "우아하지 않은 선택"이라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3일(현지시간) 이날 한 행사에서 바티칸 중재론에 대해 "아주 현실적이지 않은 선택지를 두고 정신적 능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어 "바티칸이 협상 장소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정교회 국가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이 가톨릭의 땅(바티칸)에서 분쟁의 근본 원인 제거 관련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조금 우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바티칸 자체도 이런 상황에서 정교회 국가들의 대표단을 초대하는 것이 편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 16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3년 만에 협상을 재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바티칸에서 다음 회담을 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는 가운데 나온 발언이다.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은 다음 주 바티칸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실무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바티칸의 중재하는 회담에 대해 "훌륭한 생각"이라며 찬성했다.

레오 14세 교황도 바티칸 교황청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회담 장소로 제공하도록 하겠다고 했다고 피에트로 파롤린 교황청 국무원장이 밝혔다. 바티칸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도 이를 환영했다.

서방 국가들이 바티칸의 중재를 반기는 데 반해 러시아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라브로프 장관은 "우리는 항상 최고위급과 다른 수준에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고 제거하는 데 전념할 평화 회담에 준비됐다고 강조해왔다"며 "차기 협상 날짜와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결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에서 "다음 협상을 위한 플랫폼에 대한 결정이나 합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 결정은 한 쪽이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양측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외무부의 로디온 미로시니크 키이우 정권 전쟁범죄 감독 특사는 현지 일간 이즈베스티야에 바티칸에서 협상이 개최될 가능성은 있다면서도 "반드시 양측의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바티칸을 서방의 일원으로 볼지, 중립 지역으로 볼지가 이러한 결정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옐레나 포노마레바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MGIMO) 교수는 이즈베스티야에 "바티칸은 서방 체제의 일원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며 "회담 장소를 바티칸으로 옮기는 것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그의 후원자들에게만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반면 러시아 싱크탱크 러시아국제문제위원회의 스베틀라나 가브릴로바는 "바티칸은 유럽연합(EU)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속하지 않으며 러시아의 '비우호국' 명단에도 없다"며 "유럽에서 가장 중립적인 지역"이라고 평가했다.

EU 제재 대상인 올가 류비모바 러시아 문화장관은 지난달 바티칸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이는 바티칸의 중립성을 보여준 사례로 인식된다. 하지만 류비모바 장관은 레오 14세의 즉위식에는 '비행경로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러시아 싱크탱크 발다이클럽의 전문가 안드레이 코르투노프는 지난 16일 이스탄불에서 튀르키예 측 대표단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장에 계속 남아 있던 상황을 러시아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고, 튀르키예가 지난 3년간 러시아보다는 우크라이나에 가까웠기 때문에 러시아도 협상 장소 변경에 관심을 둘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평화 협정을 체결할 경우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명할 자격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러시아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임기가 지난해 5월 만료됐는데도 계엄을 이유로 불법적으로 연장된 상태라고 주장한다.

라브로프 장관은 "젤렌스키의 정당성 문제는 평화 협정을 체결할 때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막심 무시힌 러시아 외무부 법무국장도 전날 타스 통신에 "우크라이나의 '현 지도자'는 외부는 고사하고 국내에서도 오래 전에 정당성을 잃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서명한 협정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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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바티칸의 우크라 협상 중재 반대하는 속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차기 평화 협상 장소로 바티칸이 거론되는 상황에 대해 러시아 외무장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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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와 정리
정교회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로부터 공인(AD 313)되기 이전부터 보급되어 있던 종파로 그리스, 러시아, 동유럽 등의 지역에서 사도 시대(예수 탄생 후인 AD 30년경)부터 발전한 그리스도교회의 총칭이다.
​313년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대제(1세)에 의해 공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교가 보급된 지역은 대부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로마교구만은 문화적으로 뒤져 있었고 로마의 총대주교는 다른 총대주교들에 비해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위까지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교황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였다.
​결국 동서 양 교회 간에는 정치적으로 틈이 생겼는데, 교황 레오 3세에 의한 프랑크국왕 카롤루스대제의 대관은 로마황제권에 대한 반역이라고도 할 만한 사건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포티오스( Photios) 라는 인물이 일개 외교관에서 단번에 총대주교로 뽑혀 교황 니콜라오 1세가 반발하고 나섰다. 또 교리상의 다툼도 있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信經)>의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에 로마 측이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를 첨가한 사실에 대해 동방이 비난하였다. 또 독신 성직자만 성직자로 허용하는 것과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성체(聖體)로서 사용하는 로마 측의 관행에 대해서도 동방이 반대하였다. 즉, 동방정교는 결혼한 사람도 성직자가 되는 것을 허용했으며, 로마교황을 다른 주교들보다 높은 위치와 권력을 가진 이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054년 결국 고대교회는 동서로 분열하여,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배경으로 한 정교회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분리되었다. 제4회 십자군 의 서유럽 병사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기 때문에 서방 그리스도교가 비잔티움 제국 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 양 교회의 대립은 한층 깊어졌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하의 동방정교회는 19세기 중엽에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약 350년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이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던 동안은 러시아가 그 대신 정교의 대(大)보호국이 되었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서방 교회는 1517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으로 다시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 현재의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탄생하였다.
동방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예루살렘·불가리아·러시아·조지아·세르비아·루마니아·그리스· 키프로스 ·알바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일본 등에 자립교회를 두고 있다. 정교회 신도들은 성탄절보다는 부활절 을 중시하며, 초대 교회의 전통을 가장 잘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 정교회가 전파된 것은 1900년 러시아인 흐리산토스 세헷콥스키 신부가 들어와, 1903년 서울에 성 니콜라스 성당을 세워 선교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프랑크왕국
부족국가에서 발전하여 점차 다른 게르만 제부족을 정복 통합하고, 피레네산맥에서 엘베강에 이르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포함한 대제국이 되었으며, 민족대이동 후의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유럽의 정치적·문화적 통일을 실현하였다.
프랑크왕국은 서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적 게르만 통일국가로서 그리스도교 문화 및 중세 여러 제도의 모체(母體)가 됨과 동시에,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의 국가가 그 분열·붕괴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다. 프랑크왕국의 역사는 그 지배왕조에 의해서, 전반의 메로빙거왕조 시대와 후반의 카롤링거왕조 시대로 나뉜다.

프랑크왕국 카롤링거왕조와 가톨릭교회 관계
초기의 카롤링거 왕조와 가톨릭 교회 간에는 공고한 유대가 확립되었다. 당시 카롤링거 왕조는 이슬람 세력과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정교회에 대항하는 기독교 유럽의 제일 강자로 부상했다. 교황의 지지를 받았던 소(小) 피핀과 그의 아들 샤를마뉴는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랑고바르드 왕국을 물리쳤고,교황에게 로마 부근의 광활한 영토를 남겨 주었다. 이 교황령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존속되었다.
또, 카롤링거 왕조와 국왕들은 교회에게 각종 면제의 특권을 수여했다. 즉, 국왕은 교회령에 대하여 세금이나 사법, 군대 소집 등의 공권력을 포기한 것이다. 십일조세를 일반화시켰으며, 기독교 도덕을 널리 전파하고 재속(목회) 성직자들과 정식으로 교회의 관할하에 있는 정규(수도원) 성직자들을 구분하여 교회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위그 카페 왕조 역시 로마 교회와의 유대를 다시 재개하였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동·서로 분리된 교회를 통합하는 기회로 삼고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전쟁을 선포하였던 곳도 바로 프랑스의 클레르몽(오늘날 클레르몽 페랑시)이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에 프랑스와 노르만 기사가 대거 참여했고, 또 12세기에 루이 7세와 필립-오귀스트 국왕은 제2, 3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었다.

비잔티움 제국
4세기 무렵, 로마 제국이 동 · 서로 분열할 때 아르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도읍으로 하여 세운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1000년 가까이 지탱되면서 이슬람의 침입으로부터 유럽 세계를 보호하였다. 6세기 중엽에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지중해 세계를 다시 통일하고, 안으로는 유스티아누스 법전을 편찬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 등을 세워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았다.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며 번영을 누렸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적 전통 및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 문화가 교차하는 문화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와 아랍, 셈, 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비잔티움은 문화적으로 수용력이 대단히 큰 제국이었다. 12세기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여러 종족 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등으로 재정과 인력이 고갈되었다. 13세기 이후부터는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의 유행으로 국력이 더욱 약해졌다. 결국 1453년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되었다.

십자군전쟁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자군의 태동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고 또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배타적 싸움이라는 점에서도 종교전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는 복합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모험심·약탈욕구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광기와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흑사병
1799년 3월, 이스라엘의 항구 도시 자파에서 나폴레옹의 1만 2000명의 군사 사이에 흑사병이 퍼졌다. 중세 유럽의 막을 내리게 한 흑사병의 기세는 18세기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안녕하세요 흔한 직장인입니다.
오늘의 기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중인 나라들 중 러시아, 우크라이나 관련 기사들 중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제목을 보시면 평화협상 회의를 할 나라를 유럽연합에도 나토에도 속하지 않으며 러시아 비우호국에도 속하지 않은 곳 바티칸을 언급을 하였습니다.
그런 언급을 관련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좋은 선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러시아쪽은 바티칸은 서방국 일원이며 우크라이나와 후원 국가들에게만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만약 우크라이나와 평화 협정을 할 경우 젤레스킨 대통령은 이미 임기 5년이 지나서 서명할 자격이 없다고도 직접적?으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개인적으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에 끝까지 배팅을 하기 보다는 새로운 비즈니스, 거래 ? 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전쟁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전쟁 초기에 생각을 했던 거와 다르게 거대한 판을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추측을 해보자면 러시아의 전쟁의 적은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서방 전체, 나토 , 자유주의 질서 등으로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런 전쟁의 정당화 수단을 지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역사 , 이념, 문화의 충돌로 승화, 내면적 의미로는 단지 국경을 지키기는 것이라 러시아의 문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게는 전쟁은 외교수단이 아니라 통치수단이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끝내지 않을 뿐더라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이 전쟁에서 발을 뺴고 있는 추세로 유럽연합 또한 우크라이나에 여러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미국이 발을 뺴고는 있는 시점으로 유럽연합 자국 내 안보에 더 준비를 해야하는 상황이 다가오니 전쟁 초기 때만큼의 지원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그런 상황이 우크라이나 젤레스킨 대통령은 미국, 유럽연합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 자국내 전쟁으로 인한 피해 등등 사유로 이 거대한 판에서 유리한 이점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ㅎㅎ

여러분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댓글로 공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이 글은 개인적인 느낌을 적은 글으로 정치와는 관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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